농맹인을 알게 된 지 4년이 지났다.
2020년 2월 22일 오후 2시에 송목사님을 만나 농맹인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 후로 코로나를 지나는 동안에도 드문드문 그들을 만났으니 꽉 찬 4년을 넘겼다.
농맹인은 시청각장애인을 뜻하는 말로,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시각과 청각에 장애가 있다는 시청각장애인이라는 말보다, 손으로 인식하고 대화할 수 있는 농맹인으로 불리길 바란다.
처음 송목사님을 만났을 때, 매달 전국의 농맹인들이 서울에서 예배모임을 갖는데, 예배 끝나고 나면 밥 먹는 것 외엔 딱히 할 게 없다고 하셨다.
마침 내 작품이 전시중인 곳이었기에 농맹인도 촉각이 있으니 흙으로 작품 만드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떻겠냐고 여쭸다. 목사님은 너무 기뻐하시며 눈물을 비췄다.
그렇게 시작된 모임에서 한동안 흙 작업을 진행했지만, 곧 농맹인들의 회의 끝에 작업은 보류되었다.
손의 감각이 절대적인 농맹인에게 흙을 만지는 것이 즐겁고 유쾌할 수도 있지만 어떤 분들은 불쾌하고 찝찝하게 느꼈을 테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작품을 만드는 것보다 같은 처지의 농맹인끼리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빼앗기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골방에 갇혀 지낼 수밖에 없고, 가족이라 해도 수어를 모르는 대부분의 농맹인들은 모든 시간을 홀로 보낼 수 밖에 없기에, 비슷한 처지의 농맹인들이 만나서 이야기 나누는 시간은 너무나 간절하고 소중하지만 지극히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들이 모이면 서로의 손을 맞잡고 어루만지며 촉수어로 대화한다.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으면 외로움과 간절함과 고독과 슬픔 같은 감정들이 짙게 올라온다.
한동안 줌으로 수어를 배우며 그들과 대화하길 기대했지만, 나의 게으름에 초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해, 그 후로 지금까지 모임에만 근근이 참석하며 함께하고 있음만 겨우 알리고 있다.
4년이 지나는 동안 매달 영락농인교회에서 모이는 농맹인 수는 꾸준히 늘어 지난 2월에는 70여 명의 사람들(농맹인과 촉수어통역사와 참관인을 모두 합해)이 모였다.
이들이 간절히 원하는 바람은 농맹인 법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각각의 유형에 맞는 장애인법이 있다.
시각장애인에게는 시각장애인 법이 있고 청각장애인에게는 청각장애인 법이 있어, 그들에게 필요한 복지를 제공한다.
그러나 농맹인에게 농맹인 법은 없다.
법이 없으면 전국에 몇 명의 농맹인이 있는지 파악할 의무가 없고, 교육기관이나 유형에 맞는 지원과 복지가 전무한 것이다.
그들은 그저 시각장애인이나 청각장애인 둘 중 하나에 편입되어 매우 한정적이고 현실에 맞지 않는 도움을 받는 셈이다.
도움이 필요한 곳에는 현실에 맞는 도움이,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만큼 주어져야 한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에 미술인들에게 지원사업이 있었다.
나는 코로나로 고립되던 시기에 원래의 고립이 더더더욱 가중되는 농맹인을 보면서 이 작품 <기도>를 구상했다.
영락농인교회가 위치한 종로구에 작품을 설치하고자 지원하였고, 3차까지 통과되어 최종단계까지 올라 갔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고배를 마셨다. 마지막 단계까지 올라갔던 작가에게는 패자부활전 형식으로 선정작가를 찾지 못한 지역과 연결되는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지만, 지역의 니즈와 특성이 반영돼야 했기에, 오래 기획하고 여러 농맹인의 염원이 담긴 작업과 무관한 전혀 다른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이런저런 일들과 스스로의 생활조차 버거워 <기도>는 자꾸만 뒷전으로 밀렸지만, 프로젝트나 지원금 따위가 없어도 내가 해야만 할 작품이었다.
재작년에 겨우 시작한 작업도 생계와 다른 작업에 밀려 캐스팅과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있다가 작업을 시작한 지 3년만인 이제야 겨우 마무리 되어간다.
흙 작업이 마무리되던 재작년 봄, 농맹인들이 작업실에 방문했다.
남녀노소의 손으로 눈과 입과 귀를 막은 농맹인을 표현하고자 했던 작품을 그들이 직접 만지며 느낄 수 있도록 했던 자리에서 갑자기 그들이 작품에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손으로 만지며 점토에 손자국이 생기자 누군가 제재했고, 나는 괜찮다며 손자국을 찍어도 좋겠다고 했더니 갑자기 그 자리의 농맹인들이 모두 다 엄청 적극적으로 작품에 손자국을 찍고 이름을 새기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이 작품에 자신의 흔적을 적극적으로 남기는 것을 보며 무척 당황스러우면서도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느꼈다.
마치 “내가 여기 살아있다!”고 외치는 것 같았다.